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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호랑이에 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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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티지TV 댓글 0건 조회 155회 작성일 20-07-06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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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랑이의 어원


순우리말은 '범'이라고 합니다.


호랑(虎狼)이는 '범호' + '이리랑', 즉 범과 늑대를 합쳐서 부른 말로서,

'잔인하고 모질고 욕심많은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선 후기가 들면 점차로 호랑이라는 말이 범을 대신하게 되어

북부지방에는 주로 범을, 남부지방에는 호랑이로 부르게 됐다고 합니다.


참고로 '범'이라고 하는 말도

실은 호랑이와 표범 모두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갈범, 칡범 : 칡 줄기 처럼 무늬가 있는 범 → 호랑이

알락범 : 동그란 무늬가 있는 범 → 표범

이러했다고 합니다.


호랑나비도 원래는 '범나비'였다고 합니다.


● 구한말 외국인들의 눈으로 본 조선의 호랑이





주막에서 잠을 자게 됐는데,

불을 어찌나 때는지 더워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너무 숨이 막혀서 문을 열었더니

주인이 급하게 소리를 치며 닫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호랑이 들어옴매"


어쩔 수 없이 문풍지에 구멍을 뚫고 숨을 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방안의 온도는 40도였다고 합니다.


조선은 정말 호랑이가 많은 나라입니다.


어느 마을에 한 아줌마가 호랑이에 물려간 일이 있었습니다.

물을 길러 간다고 잠깐 나갔다가 그만 변고를 당한 것인데..


나중에 보니 사람은 없고

핏자국과 사람 다리 한짝만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오죽했으면, 중국 사람들의 속담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에서는 1년의 반은 사람이 호랑이 사냥을 다니고

나머지 반은 호랑이가 사람을 사냥하러 다닌다."


그런가 하면, '은자의 나라, 코리아'를 썼던 윌리엄 그리피스는




조선 사람들은 빚을 크게 지거나, 쫓기는 몸이 되면

으레 자기 옷을 벗어다가 찢고 나무가지에 걸어두고는

호랑이한테 물려 죽은 양 헛소문을 내고 숨어버리는 일이 많습니다.

(다만 그리피스는 한번도 조선에 와본 적 없이, 오직 일본에서 줏어들은 얘기로만 책을 썼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당시 선교사들이 쓴 글을 보면 이런 것도 있습니다.




마부를 데리고 다녔는데,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 가고 있었을 때 입니다.

갑자기 마부가 정신없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Why?"


"시방 해 떨어져서 호랭이 나온당게요"


아래는 1909년 프랑스 신문에 실린 '한국의 호환도'입니다.




두 마리의 호랑이가 집 안에 침입해서

사람을 헤치는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 조선왕조실록으로 본 호환의 피해


태종



전국적으로 호랑이로 인한 피해가 많았는데,

경상도에만 석달 동안 수백명이 물려죽었다.



인조


평안도 의주에 호랑이가 떼를 지어 성벽을 타고 넘어와

시내를 활보한 사건이 발생했다.


원래 호랑이는 단독생활을 하는데,

이처럼 무리를 지어 도시 안에까지 활개를 치고 다녔으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숙종


18세기 초 기록에 보면

강원도에서만 300여명이 물려죽었다는 기록이 있다.



심지어 굶주린 호랑이가 산에서 내려와 한양 도성은 물론,

궁궐 안에까지 출몰한 일들도 있었다.


특히 북한산에 살던 호랑이가 내려와서

경복궁 근정전 뜰에까지 왔다 갔다 서성거리기도 했다.


선조


창덕궁에서 갑자기 사람이 호랑이한테 피해를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창덕궁 후원 숲 속에 암범이 새끼를 쳤던 것.

이에 화가 난 임금은 담당 관리를 크게 벌하였다.


세조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체구가 조그만 환관 박씨가 평소 이런 호언장담을 하고 있었다.


환관 박씨


"호랑이 놈, 나한테 걸려봐. 한 주먹에 처리해주지."


그런데 궁궐 후원에 정말로 호랑이가 나타났다.


세조


"잘됐구나. 니가 한번 나서봐라.

평소에 늘 그랬지, 이 얼마나 좋은 기회냐?"


환관 박씨

(사색이 되어)

"전하, 사실 제가 말은 그랬게 했으나.."


환관 박씨

"맨손으로는 무리옵고,

장창 하나와 사람 한명만 붙여주면 제가 잡아보겠습니다"


세조

"그래? 그럼 사람 하나 붙여줄테니깐 함 해봐라."


환관 박씨

ㅠㅠ

그러고 가는 모습이 하도 처량하여..


세조


"마, 그만 둬."

도로 불렀다고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쓰여있다.


이러한 호랑이의 궁궐 침입은 삼국사기에 보면

통일신라 헌강왕 때도 나온다.

그야말로 우리 역사에서 호환의 피해는 그 뿌리가 깊다고 합니다.



● 호랑이로 인한 가축들의 피해


가축들도 많은 피해를 당했는데

특히 말(馬)이 자주 해를 입어, 파발이 끊기는 일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목장이 통채로 사라진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경기도 의정부에 '녹양목장'이라고 있었는데

그곳은 호랑이의 습격이 심각해서 결국 폐쇄하고 사냥터로 만들어 버린 곳이었습니다.



▲ 현재 녹양역 앞 조형물


조선시대 유명한 목장들을 보면, 대게 섬에 있는 경우가 많은데

'호환'의 피해를 막고자 함이 커다란 이유였다고 합니다.




제주도 목장은 원래 원나라가 일본을 점령하기 위해 운용했던 것이 시초였지만

그 후에도 계속 말 목장으로 운용을 했던 것은

바로 제주도에는 호랑이가 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또 조선시대 고을 수령들의 재정 문서(해유문서) 등을 보면

가축 소비에 대해 기록한 부분이 있는데,

그곳에는 어김 없이 양, 소, 말, 돼지 등이 호랑이에게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들이 있다.


그곳 기록을 보면 주로 우리 안에서 키웠던 돼지에 비해

방목을 했던 말, 소, 양 등의 피해가 특히 많았다.



임진왜란 때는 이런 일화도 있었다고 합니다.




가토 기요마사라는 왜장에게는 아주 아끼는 애마가 있었는데

그만 호랑이한테 물려 죽은것입니다.


이에 기요마사는 화가 잔뜩 나서

수하 병사들에게 호랑이를 잡아 죽이라고 명령을 했는데,

당시 호랑이를 잡으려다 많은 왜병들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고 합니다.




기록을 보면 체구가 작은 왜병들이

호랑이 입속으로 한입씩 삼켜졌다는데.. 매우 무섭군요




● 조선시대는 호랑이 사냥은 국가적인 사업이었다고 합니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조선 정부는


호랑이를 사냥하는 전문적 군대까지 따로 두었다.


이들을 '착호갑사'라고 했다.





이 군대는 평안도에 특히 많았는데


그쪽에 가장 많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국적으로 호랑이 없는 곳이 없었다고 합니다.)


나라에서는 호랑이 사냥을 권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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